박노현 학우(M.Div 재학생)

 

오늘 본문은 사랑장 이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4~7절로 자르기는 했지만 사실 전체를 다루어야 하겠지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3장에서 잘 알고 있는 것러럼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설교 제목이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길’에 관한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왜 제가 쌩뚱맞게 길을 들고 나왔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앞서 고린도전서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지역은 항구 도시입니다. 항구 도시의 특징이 뭐가 있을까요?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당연히 도시는 발전을 했겠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성적으로 타락했던 도시였습니다. 당신 고린도인들을 향해서 “고린도인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 고린도지역의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그런 곳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고린도 교회 역시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성찬의 문제, 교회의 분쟁, 성적 부도덕, 예배의 질서, 부활의 교리, 결혼 및 이혼, 영적 은사, 세상 법정에서의 소송 등등 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현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인 13장은 과연 ‘사랑’에 관한 메세지를 주기 위해서 기록했을까요? 갑자기, 뜬금없이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뭐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좀 더 성경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 그러니까 고전 13장 바로 앞절인 12장 31절 말미를 보면 제가 왜 ‘길’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31절 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말을 합니다. ‘은사를 사모하세요. 그런데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12장은 은사에 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내에서 은사는 참 많은 문제거리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 후 14장 1절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신령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12장 31절과 14장 1절을 종합 해 보면 ‘신령한 은사를 구하십시오. 그러나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과 그 좋은 길은 무엇일까요? 처음의 물음은 “왜 길이냐?” 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질문은 “그 사랑과 그 길은 무었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면서 계속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1~3절은 교회 내에서 은사를 사용하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7절에서 사랑에 관하여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오래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또한 무례히 행치도 말아야 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렇게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은사의 우월감을 가지고 서로 시기 하고 있는 자들,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랑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러한 ‘사랑은’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교인 여러분’ 나아가 지금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박노현’이라고 바꿔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여러분 이미 여러분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만 가지고 있다면 당시 교인들과 지금 교인들 즉, 우리들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이 4~7절은 중의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말이고요.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단어의 사랑은 우리들의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시키셨나요? 너무 당연한 질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오늘 본문의 구절을 통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많은데, 우리는 교인 서로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내 것을 먼저 챙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라며 뽑내는데 그런데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다름 아닌 제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 였기 때문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내 것을 챙기고, 교만한 모습.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나를 구원하기 위해 또 다른 이를 구원하기 위해 주셨는데 저는 그 성경을 하나의 도구 삼아 정죄의 잣대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의로운 재판관이 되어서 성경 위에 서서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며 조각을 내고 있었습니다. 재밌더라고요. 좋더라고요. 현 교회는 이렇고 저렇고. 의로워진 제 모습이 참 뿌듯했습니다. 날카로운 매의 눈을 가진 박노현. 멋지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제게 ‘노현아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말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누가 더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노현아 사랑은 나다, 내가 사랑이고 나로 향하는 그 길이 사랑의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은사를 자랑하고, 내가 가진 그 무엇을 자랑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갖는 것.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 그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여려분 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은사도, 현 교회가 가진 문제도, 내가 가진 문제도 모두 뛰어 넘어 한 곳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나의 길은, 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래참는 것, 온유한 것, 시기하지 않는 것,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 것,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보며 견디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저희를 위해 자기의 모습까지도 내려놓은,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향하는 오직 한 길. 그 길을 걸어 가기 위해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 되는 것은 오직 하나 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할 수 없었던 사랑 앞에 자신들의 절망을 바라 보았던 것. 하지만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았던 것. 바로 그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는 바로 그 한 가지 입니다. 그 사랑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