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경 (Stella Yoo)

 

파아란 하늘은 저리도 청명한 가을인데, 가쁜 숨 한 모금에 와 닿는 느낌은 아직도 한 여름이다.  지난 한달 여, 두번의 호흡곤란으로 응급실행과 또 한번의 쓰러짐을 겪은 나의 몸은 그 어느 해 보다 소중하게 가을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흘끗 바라 본 달력에 새겨진 10월이란 글자의 의미가 무색하도록, 유난히 긴 올해 여름의 이 무더위도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가을향기 듬뿍 담은 살랑바람으로 나의 가쁜 숨을 시원하게 틔워주리라.

 

20여년전, 어둠의 깊고 긴 시간을 지나 ‘빛’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나를 살게 하신 ‘생명’이었고, 이후로도 그 하나님 한 분이 내가 살아있음의  ‘이유와 목적’이 되도록, 주님은 모든 상황 가운데 때 마다 신실하게 이끌어 인도해 주고 계시며, ‘믿음의 삶’을 순종으로 드릴 때 마다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리의 참된 것들로 풍성히 채워 주시고 감사를 넘치게 하시기에, 때로는 이 삶이 힘겹고 지칠 때 있어도, ‘인내’ 가운데 더욱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소망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내던 중,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쓴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한 손에 잡히는 자연스런 색감의 소 책자는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의 주제를 가볍고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가 집중하게 해 주며, 옆에 놓인 한 잔의 커피를 친구삼아 한 장, 한 장, 작가가 끌고가는 펜 끝의 논리를 따라 기독교 신앙의 ‘큰 그림’ 여행에 참여하게 해주었다.

 

저자 자신이 청소년 시절 무신론에 빠져있던 경험이 있었기에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근본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자들의 질문에 다가가, 사르트르나 도킨스등 완고한 무신론자의 답들을 서술해 보여주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이성주의나 합리주의의 한계를 차분히 풀어내며, 더 나아가 무신론자 시절 저자 자신 속에 감추어졌던 군중심리와 자기도취적 교만까지 고백적으로 서술하여, 거대한 우주와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인정은 물론,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 필요함을 제시하고, 실재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큰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또한, 합리적 이성주의와 과학적 사고등의 한계를 짚어낼 때,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 그가 지녔던 옥스퍼드 대학 분자생물학 박사 이력을 십분 활용하여 과학사, 과학철학등을 아우르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성에 대한 ‘얄팍한’ 접근과 ‘깊숙한’ 접근을 구분하려 하는것의 필요를 인정한다는 것과, 매우 제한된 방법으로 다 증명할 수 없어도 가질 수 있는 여러 신념의 부분을 인정하며, 깊은 직관에 기초한 상상력의 도약을 통해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흥미로운데,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말, “새로운 땅을 찾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여행이다.” 라는 인용을 한다.  맞다, 우리는 ‘새로운 눈’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 ‘새로운 눈’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평범한 일상 가운데 깨달아진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보았을 때’ 사물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과 신약성경 중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2) 말씀을 인용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것을 설득하고 있다.

 

믿음을 갖기 전에 왜곡 된 세상만 보던 자가 회심 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모습대로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더해지는 흥분과 열정과 경이감은 하나님의 그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탐험하게 되기에 자신도 모르는 힘과 추진력이 복음의 능력으로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크신 하나님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수임을 서술한다.  이 지도 자체가 풍경은 아니지만 길을 찾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독교의 신조는 믿음의 여정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에게 지도의 역할을 해 주는 것임을 생동감 있게 전개해 준다.  진실로 기독교의 신조는 성경의 핵심 주제들을 정제해서 완전한 사랑과 공의로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께 이끄는 푯대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큰 그림’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도와주고 하나님을 아는 풍성함으로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것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지만, 이렇게 ‘눈을 뜬 자’가 좀 더 주의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가 왜곡 된 베일을 만들어 실재를 가리고 싶어하는 ‘장밋빛 안경’을 종종 쓰기도 한다는 현실임을 완곡하게 짚어준다.  우리가 복음의 렌즈를 통해 볼 때에만, 우리의 진짜 처지인 ‘죄인’임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불편한 진실을 다루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바른 진단으로 바른 치료법에 이르게 하는 빛으로 나아가야 하는 분명한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큰 그림’ 속에서 신조가 갖는 의미는, 피조물로서 여전히 한계가 있는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인생의 방향을 바로 알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고,  불확실한 것들이나 어려운 일들을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를 믿음 안으로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이해의 틀로서 꼭 필요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풀어준다.  또한 저자는 ‘신조’를 담아내는 수단인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실재’ 사이에 항존하는 상당한 간극을 설명하며 이 한계성과 힘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더 깊은 실재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예배’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파노라마 처럼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다.  단순히 관념에 머무는 죽은 신이 아닌 살아계시며 예배와 경배 가운데 우리를 만나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 할 수 없고, 존 던(John Donne)이 사용한 표현처럼, “영광의 넘치는 무게” 를 감사로 느끼게도 하시는 결코 몇 마디 말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분이시다.

 

저자의 기억으로 서술한 표현 중, 복잡하고 클 수록 한 눈에 다 보기가 힘들다 한 것 같이 우리는 신조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크신 ‘어떠함’ 속으로 초대 되어진 축복받은 자이다.  믿음의 삶을 걸어가며 때로는 고난의 풍랑 가운데 놀라기도 하고, 더디 말씀하시는 듯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 인내해야 할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신 든든한 말씀을 성령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따라가노라면 그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고, 빠른 길이며,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길이었음을 날마다 고백하게 하시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이끄심을 또한 고백하게 된다.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소망 중에 인내하며 걸어가다보니 어느덧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사랑하는 자’ 되게 하시는 그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니, 이제는 자발적 기쁨으로, ‘발코니에 서서 바라보는 자’이기 보다는 ‘길 위에서 함께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는’ 순례자 되기를 순종하게 더욱 이끄시리라.

 

주님, 이 긴 여름 끝나고 가을은 분명 옴을 믿듯이, 믿음의 경주 후에 기쁨으로 추수 할 곡식 많을 것을 믿고 바라봅니다.